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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친 눈길의 페이지

귀신-강정

 한 학기동안 가방에 넣어놓고 다니니 이렇게 해져버렸다. 반년동안이나 함께한 이유는 결코 좋아서가 아니다. 전작을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일까, 1부를 읽는 내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에픽하이 5집을 듣는 느낌, 리버풀의 이번 시즌을 보는 느낌이었다. 처형극장이나 키스에서 본 그의 모습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은 변한다는 기본적인 명제를 체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2호선 그는 5호선, 운 좋게 왕십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처럼 운 좋게 두번이나 만났다고 생각하려했다. 

최초의 책


희원일까 체념일까
책갈피 속에서 동그란 점이 하나 떨어졌다
지난밤에 올려다본 달일 수도 있다
부식토 냄새가 난다

한 개 점을 오래 들여다본다는 건
세계로부터 자신을 덜어내
다른 땅을 핥겠다는 소망

머리를 박고 울면서
점 안으로 자라 들어가는 고통의 뿌리로부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무와 풀들의 수원을 찾는다

나는 머잖아 숲이 된다
나무들을 끌어안고
나무들의 무덤이 되어
다시 동그란 점이 된다
지구를 알약처럼 삼키고
손때 묻은 우주의 벌목 지대에서
천년을 잘못 읽히던 책 한 권,
비로소 제 뜻을 밝힌다
수의 벗듯 문자를 풀어헤쳐
돌의 이마 위에 투명하게 드러눕는다

나뭇잎 한 장이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는다
나는 미래의 기억을 다 토했다


 혹시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뒤에서 부터 읽기를 간곡히 청한다. 잃어버린 그를 4부에서 찾았다. 말초신경을 질척이게 건드려주는 그의 축축한 시가 너무 좋다. 어쨌든 그의 시가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은 분명하다. 이제 보내주어야겠다. 그리고 나는 계속 처형극장과 키스에 파묻혀 살겠다.


귀신

저자
강정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9-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바람 지난 자리의 유령 발자국들. 말은 늘 마지막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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