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터무니 없는 시작이다. 코끼리, 기린, 앵무, 부엉이. 동물을 좋아하는 전원적 시인인가 싶었다. 그러더니 기린이 그린 구름 그림이라니 다부지 시학회에서나 취급될 작품이...... 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이 시가 나왔다.
달과 부엉이
달과 부엉이는 가깝다. 기억과 종이는 가깝다. 모자와 사과는 가깝다. 꽃과 재는 가깝다. 모래와 죽음은 가깝다. 나무와 열매는 가깝다. 수풀과 슬픔은 가갑다. 눈물과 바람은 가깝다. 구름과 어둠은 가깝다.
밤의 부엉이는 날아오른다
멀어지는 달을 바라보는 부엉이의 눈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은색
한순간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수풀
그늘이 드리워진 몸
고여 있는 물에서 떠나온 벌레들
부엉이는 머리를 돌린다
앞을 바라보듯 뒤를 바라보는 몸
벌레의 날개 날개의 잎맥
수풀 속에서 슬픔을 감추듯
백지 위에서 사라지는 한낮
연기를 날리며 피어오르는 꽃
타오르기 전의 윤곽이 재의 얼굴로 되살아날 때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은색
어둠을 밀어내며 날아가는 거대한 날개
꽃에게서 재에게로 흐르든지
재에게서 꽃에게로 흐르든지
바람과 구름은 가깝다. 얼굴과 날개는 가깝다. 나무와 벌레는 가깝다. 어둠과 호수는 가깝다. 유리와 심장은 가깝다. 죽음과 묵음은 가깝다. 정오와 자정은 가깝다. 얼음과 울음은 가깝다. 밤과 몸은 가깝다.
가깝다, 가깝다, 가까운 대상들을 묶어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그리고 읽어보면 실제로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말로 실현될 때 리듬을 시인이 예상한 것이 분명하다. 수풀과 슬픔, 얼음과 울음의 대상이 가진 속성도 유사하지만 음상 또한 유사한 것을 보았을 때 시인은 이 시를 읽는 시로 쓴 것이 분명하다. 가깝다고 되뇌이는 과정 속에서 독자가 그 의미를 참되게 파악할 수 있다.
다른 시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 시집을 훑어 본 몇몇 또한 비슷한 단어와 통사구조가 반복되는 이런 구조가 실험적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가 보기에 그랬다면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반복되는 구절을 통해 이목을 잡아 끈다.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첫째로 눈길을 잡아 끄는건 리듬, 반복과 같은 형식이지만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수 많은 반복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이다. 읽을 때 마다 우리 생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평범한 명제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이어져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을 잡아내는 미학이 반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구조이었던 것이다.
너울과 노을
눈물 다음에 너울이 온다 너울 다음에 하늘이 있고
하늘 너머로 얼굴이 있다 얼굴 사이로 바람이 오고
바람 속에는 마음이 있어 마음 위로는 노래가 오고
노래 사이로 호흡이 있고 호흡 속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 너머로 구름이 있고 구름 너머로 저녁이 오고
저녁 너머로 안개가 있고 안개 너머로 들판이 있고
들판 너머로 먼지가 일고 먼지 너머로 거리가 있다
거리 속에는 정적이 있고 정적 사이로 언덕이 있고
언덕 위로는 나무가 있어 나무 다음에 눈물이 오고
눈물 다음에 너울이 있어 너울 너머로 노을이 진다
안목이 없어 더 좋은 시를 소개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지금까지 읽은 시집 중에서 꽤 많은 페이지를 접은 축에 속한다. 거의 제일 많이 접은 것 같다. 읽으면서 아리송 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나선의 감각―빛이 이동한다, 거실의 모든것, 잔디는 유일해진다, 흑과 백의 시간속에 앉아,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유령의 몫, 가장 큰 정사각형이 될 때까지, 파노라마 무한하게, 나선의 감각―음 등을 좋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