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작품을 읽어야하나보다. 언뜻 봐서 이해하지 못해 찾아본 줄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두번째 읽을 때에는 이렇게 서사구조가 전혀 필요없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세번째 다시 읽었더니 왜 이렇게 썼는지 그래도 좀 갈피가 잡히는 것 같았다.
동경에서 유학중인 이인화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지만 바로 내려가지 않고 정자를 만나고 을라를 만나고 자기 볼일 다보면서 찾아간다. 그리고 결국 아내가 죽고 나서는 후처로 어떤 이가 적당할까 생각하는 모습에서는 무정의 이형식보다도 더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보다는 목욕탕에서 조선사람을 갖다 파는 일본인들 보면서, 또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갓장수를 보면서 전개된 그의 단편적인 생각이 더 중히 보아야할 것이다.
구더기가 들끓는 공동묘지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그 공동묘지를 밭으로 일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도 재미없는 소설을 읽어야한다고 강조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소설이 그러니까 쟁기를 들고 낫을 들고 열심히 일합시다 이런식으로 나왔다면 진작에 때려치지 않았을까. 무덤을 공동묘지, 그것도 구더기가 들끓는 바로 그 모습을 보여주어서 염상섭이 리얼리즘 작가의 대표로 손꼽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너 아버지를 찾아간대야 얼굴이 저렇게 이쁘니까, 그걸 미끼로 팔아 먹으려고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니? 그것보다는 여기서 돈푼 있는 조선 사람이나 하나 얻어가지고 제 맘대로 사는 게 좋지 않으냐. 너 같은 계집애를 데려가지 못해하는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도 그득하리라." 나는 타이르듯이 이런 소리를 하고, 계집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글쎄요...... 하지만 조선 사람은 난 싫어요. 돈 아니라 금을 주어도 싫어요." 계집애는 진담으로 이런 소리를 한다.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자기의 운명에 검은 그림자를 던져 준 무슨 주문이나 듣는 것같이 이에서 신물이 나는 모양이다.
- 만세전 中-
만세전의 원제가 묘지란다. 묘지. 섬뜩섬뜩하다. 이렇게 한 시대를 잘 꿰뚫어보다니 무섭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일까. 아직도 묘지일까.